Discover맛있는 교회사 이야기[08/16]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3
[08/16]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3

[08/16]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3

Update: 201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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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 신학사상의 변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주임목회자로 청빙 받은 츠빙글리는 본격적인 개혁에 나설 즈음 당시로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에 걸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츠빙글리는 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발병 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음악을 짓는데 몰두하던 그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에라스무스적, 인문적 개혁 의지를 버리고 성경에 몰입하여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개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연구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를 통해 복음의 능력과 내용을 깨우친 후 오직 예수의 화해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며 본격적인 종교개혁에 나섰습니다.

1551년 츠빙글리는 뮌스터교회를 이끌어 가는 24명의 수사회원 중 한 사람이 되어 목회자와 감독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자신의 교회개혁 의지와 구상이 지지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522년에는 ´권위 문제‘에 부딪혀 기존 교회의 제도와 공의회, 교리,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인문주의자들과 갈라서게 됩니다. 이들의 노선과 달리 츠빙글리는 기존 교회의 권위를 모두 부정하고 오직 성경 즉 하나님 말씀만을 새로운 권위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 개혁에 나선 것입니다. 이 때 츠빙글리는 성경주석을 통해 설교로 이어지는 과정을 가르치는 선지학교 즉 목회자 양성학교인 프로페찰을 신설하였고 철저히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개혁에도 나섰습니다.

당시 취리히 상황

그로스뮌스터 교회에 행해진 츠빙글리의 강해설교에 영향을 받은 청중들은 기성 가톨릭교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시작했습니다. 즉 마리아 상과 그에 대한 숭배, 성자숭배, 수도원 부패, 성직자의 독신제도 등을 공개 비판하였고 그 가운데 당시 가톨릭교회 영향으로 사회제도로 정착된 사순절 금식과 고기 취식 금지 등 경건운동의 율법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 규례를 깨뜨리려 했습니다. 즉 1522년 3월 열 두 명이 출판업자의 집에 모여 의도적으로 소시지를 먹었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져 여러 곳에서 소시지 사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사순절 기간 중 고기취식을 죄로 여겨 이를 처벌할 성경적 근거는 없으나 기존의 전통을 존중해야 하며 다만 공공질서를 파괴하거나 여러 사람을 시험 들게 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즉 사순절 기간 중 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이나 공공의 질서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금식규례는 교회를 떠나 사회적 쟁점이 되어 시의회 사안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시의회는 그로스뮌스터교회 상임위원회에 이 문제에 대한 진단을 의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며 갑작스럽게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견해를 밝혔고 취리히의 성직자 대다수가 이에 찬성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의 콘스탄츠주교가 특사를 파견하여 협의한 결과 한시적이라는 단서를 달아 금식규례를 지키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의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중세교회의 권위가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이 말씀과 충돌하는 사건이었으며 츠빙글리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중세교회의 전통인 교부보다는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참된 권위이며 따라서 마리아 숭배와 마리아의 중재사역, 경배대상 등에 반대하고 성인 숭배 또한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취리히 시의회도 이에 동조하고 따랐습니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1522년부터 결혼을 유지하여 네 자녀를 두었으며 이를 취리히의 사제들이 따르다가 교회로부터 파면되자 스위스 공동연방체에 자신을 의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츠빙글리의 성경이해

당초에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인문학적 이해와 기반 위에서 출발한 츠빙글리의 개혁은 이 무렵 에라스무스와 갈라서게 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즉 1522년 에라스무스와 결별하면서 츠빙글리의 성경이해는 더욱 분명해졌는데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은 죄에서 자유 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이에 응답할 수 있으며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성직자나 그 어떤 매개체로도 대신할 수 없고 셋째 인간의 사사로운 성경해석과 인문주의 적 성경해석에 반대하며 인간의 이성을 포기하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함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식 논쟁

사순절 금식논쟁과 관련해서 취리히 시는 양분되었고 시의회도 양분되었으며 이 문제는 스위스 연방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었습니다. 연방은 취리히 시가 양분되는 것을 막고 어떻게 해서든 통합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 광장 민주주의식의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시 대의회가 성직자를 초청해서 공개토론회 열었는데 이 토론회는 시의회가 주관하여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일반대중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으며 성경에 근거해서 의견을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교회주도의 성직자 중심토론회나 대학중심 토론회가 한정된 지식층만 참석해 라틴어로 진행되었던 것과 확연히 비교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선구적인 직접 민주주의적 공개토론회였고 이 직접 민주주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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